진성이 네가 소희야 사랑해, 한마디했잖아? 그럼 여우계단 이딴 거 안 올랐어.

우리가 10년 뒤에 런던 오페라하우스에 있는 거야. 내가 지젤 하고, 네가 알브레히트 하고. 진짜 멋있겠다, 그치?
(이건 거의 뭐, 애인이랑 몰래 데이트하고 나서 몰래 집에 들어가는 모습이나 마찬가지다.)
진성이와 밤새 같이 놀고 아침에 준비하면서 이런 말을 하는데, 편견이 지켜주는 대한민국에서 소희의 마음을 우정으로 덮고 넘어가지 말라고 너무나도 직관적으로 설명해준다. 지젤에는 여성 무용수가 할 역할이 잔뜩 나온다. 그런데도 굳이 진성이에게 알브레히트(지젤과 사랑에 빠지는 남자 주인공) 역을 지정해 줬다는 건 아무래도 소희에겐 진성이가 백마 탄 왕자, 나만의 연인, 이런 느낌이어서겠지.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후 소희가 진짜 지젤처럼 유령이 되어버린다는 점에서 발레라는 소재를 참 잘 잡았다 싶었다. 감독하려면 이 정도로 세세하게 생각해야 하는구나. 멋진 걸. 아무튼, 이런 소희의 마음을 진성은 이해할 수 없다. 진성에게 주어진 현실이 이미 너무 버거워 소희의 환경과 마음까지 되짚어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진성에게 소희는 절친한 친구인 동시에 이기고 싶은 대상이다. 그런 상대가 저런 말을 해봤자 진성은
내가 왜 알브레히트야? 당연히 지젤이지.
이런 답밖에 들려줄 수가 없는 것이다. 진성은 당연하게도 본인을 주연으로 두는 소희의 속뜻을 이해하지 못했고 소희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길 수 없어 열등감이 생긴 진성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처한 환경과 겪는 상황이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에. 이 와중에 지젤을 연기하면 대상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콩쿠르엔 소희가 내정되기도 한다.
이때 발레반 선생이 '지젤은 본래 테크닉도 중요한데 감정이랑 감성이 풍부해야 해. 근데 너는 표현력이 좋잖아.' 라며 소희에게 콩쿠르에 지젤로 나갈 것을 강권하는 것을 소희를 만나러 왔던 진성이 전부 듣게 되는데, 용기 내어 본인도 지젤 하고 싶다고 선생에게 말하러 온 진성에게 선생은 '지젤은 난이도가 높은 동작들이 많이 필요한 거 알지? 선생님이 네가 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그게 의욕하고 욕심만 가지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라며 네가 테크닉이 부족하여 도전할 수 없다고 진성의 간절한 용기를 딱 잘라 끊어낸다.
이를 전부 겪은 진성의 입장에서 소희의 마음을 순수히 받아들이고 이해하라는 것이야 말로 잔인한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소희를 지젤 시켜 콩쿠르에 내보내려는 선생과 소희의 대화를 들은 진성은 생각이 많다.

복도 계단의 난간에서 외줄 타듯 한 걸음씩 조심스레 걷는 진성의 모습은 진성이 처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친구이지만 질투가 나는 소희, 수업 빠지고 공연 갔다가 혼나면 어떡하냐는 진성이를 이끌고 간 소희, 그러나 선생에게 신체적, 능력적 모욕을 들으며 혼나는 건 진성이 혼자. 선생의 분노를 말리고 선생의 관심을 끌어가는 것 역시 소희. 제 편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기숙사로 돌아가는 진성과 엄마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소희의 차이. 진성이는 이렇게 곳곳에서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다 열심히 해도 재능과 집의 지원을 모두 갖춘 소희의 벽은 넘을 수가 없다. 그런 상황 속에 진성이가 디딜 수 있는 땅은 아슬아슬한 복도 난간처럼 좁고 불안정하다.
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이 연출.

불안정한 상황을 어떻게든 걸어 나가려고 하는 진성의 걸음을 잡아채는 소희의 손.

그리고 심각한 진성이의 상황을 놀리듯 가벼이 말하는 소희.
소희 관점에서야 진성이가 어떤 대화를 듣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모르니 정말 장난을 친 것이었겠지만 진성에게는 소희의 그런 모습조차 기만으로 느껴졌을 것 같다. 한편으로는 소희에 관한 진성의 불안하고 위태로운 감정을 소희가 붙잡아 다시 한번 제 곁에 끌어둔 것으로 읽히는 연출이기도 해서 재밌고 맛있고 나 정말 감독님이 코멘터리 같은 거 찍어서 전체 해석과 설명을 해줬으면 좋겠다. 흑흑.
이런 모습과 토슈즈가 없어졌다고 빌려달래서 빌려줬더니 토슈즈 너무 낡았다고 새로 사라고 웃으며 가벼이 말하는 소희의 모습들이(소희는 애가 참 구김살이 없고 스스럼도 없다. 귀여워. 이게 약간 맑눈광공 같은 면모가 보이기도.) 쌓이고 쌓여 진성은 결국 여우계단에 가서 콩쿠르에 본인이 나가고 싶다는 소원을 빈다.
자! 여우 계단. 드디어 여기에 여우 계단이 나왔다. 사실 여우 계단은 첫 인트로에서도 그렇고 진성과 소희의 대화에서도 그렇고, 혜주의 장면에서도 많이 나오는데 이 여우 계단이라는 건 계단을 숫자 세며 올라가면 분명 28개일 계단에 29번째 층이 생기고 거기서 소원을 빌면 소원을 이루어진다는 흔한 교내 괴담이다.
그런데 이 계단이 소원을 들어주는 방식이 참 기괴하다. 여우야, 여우야, 내 소원을 들어줘. 하며 비는 모든 소원은 기이한 상태로 이루어지는데, '콩쿠르에 내가 나가게 해달라'는 진성의 소원은 소희가 계단에서 굴러 심각한 다리 부상으로 콩쿠르에 나갈 수 없게 되며 이루어졌으며 '살이 쏙 빠지게 해달라'는 혜주의 소원은 과도한 약물 복용으로 인한 부작용이 동반되어 이루어졌다. 중간에 '최고의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소원을 빈 것 같은 윤지는 본인이 죽어 작품으로 위장당함으로써 보는 이에게 최고의 작품이라고 인식되는 형태가 되어버렸고 '내게 소희를 다시 돌려달라'던 혜주의 두 번째 소원은⋯ 결국 소희가 될 수 없었던 혜주의 자살로 끝이 났다.
이렇게 보면 비틀린 방식으로 소원을 이루어준 듯싶으나, 실상 파헤쳐보면 여우계단은 사실 그 어떤 소원도 이루어주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콩쿠르에 내가 나가고 싶다는 진성이의 소원은 진짜 콩쿠르를 나가고 싶은 게 아니라 소희를 단 한 번이라도 실력으로 이기고 싶었던 게 본심인데 소희를 망가뜨려 진성이가 콩쿠르에 나가게 됨으로써 진성이는 영원히 소희를 실력으로 이길 수 없게 되었다. 전성기의 소희는 여전히 진성의 앞에 거대한 벽으로 남아 있을 것이므로. 그리고 그로 인해 콩쿠르에서 대상을 따왔지만(이건 소원에 포함이 안 되어있었으니까 진성이 실력이 맞다. 진성이도 실력 출중해요. 소희가 너무 넘사로 나와서 그렇지⋯.) 아무도 진성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그녀를 비웃고 진성이 소희의 자리를 그녀를 죽여 빼앗았다고 여긴다. 즉 소희를 이겨 본인의 노력과 능력을 인정받고 싶었던 진성의 진짜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다.
혜주의 살이 빠지게 해달라는 소원. 이건 본질적으로 체형 때문에 놀림 받고 따돌림당하던 혜주가 사랑받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빈 소원인데 약물 과복용으로 인해 과하게 먹고 토하는 식이장애를 얻게 되고 그로 인해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더 '역겹다'는 인상만 심어주게 되었다. 그녀가 원하는 사람의 온기, 자신을 버리지 않는 친구는 얻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혜주가 빈 두 번째 소원. 내게 소희를 다시 돌려달라는 그 소원 역시 그 속에 있는 진심을 알아봐야 한다.
모두가 좋아하고 밝고 본인을 멸시하지 않는 소희는 혜주에게 있어 동경과 선망의 대상이자 우상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 우상은 죽어버리고 본인은 살이 빠졌음에도 아무도 자신을 좋아해 주지 않는 상황 속에 혜주는 내게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그 우상을 돌려달라고 소원을 빌었고 여우 계단은 이번에도 혜주가 진짜로 원한 소원인 친구(=소희)를 주는 게 아니라 혜주 내면에 소희의 유령이라는 망상을 심어주며 혜주 스스로가 그 우상을 따라 하고 그 우상이 되도록 애쓰게 만든다. 머리를 검게 물들고 타인을 흉내 내며 진짜 자신을 사랑할 수도, 자신을 사랑해 주는 존재를 사귈 수도 없게 만들어 혜주는 계속 망상 속 소희에게 조종당하며 고립되고 외로워진다. 결국 혜주의 진짜 소원 역시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상영 당시 혜주가 빙의 되었다 아니다로 해석이 많이 갈렸는데 나는 그때부터 빙의된 게 아니라 혜주가 여우 계단 소원으로 인해 망상 속 소희를 얻게 되었다고 봤다. 애초에 혜주가 아는 소희는 진짜 소희의 모든 부분이 아니라 본인이 늘 지켜보고 흠모하고 망상하던 소희였으니까. (여우 계단이 이런 부분에서는 꽤 정확한 것 같기도.) 소희 유령이 처음 혜주에게 말을 걸며 난 너랑 처음부터 친구 하고 싶었어. 라고 하는 부분에서 거울에 비친 혜주의 모습이 소희의 모습이 되어있는 것부터 진성이가 소희를 일부러 민 게 아니라 못 가게 막는 소희를 떼어내려다가 소희가 굴러떨어진 것을 모르고 네가 날 계단에서 밀었어도 괜찮아! 라고 하는 부분까지 뭐 하나 소희를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오히려 진짜 소희는 처음 죽고 유령이 되어 진성이를 찾아왔을 때, 진성에게 비 오는데 그냥 가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1등을 축하해준데다가 진성이 소희의 부상에 관해 죄책감을 보이자 괜찮다고 그녀를 안아주기까지 할 정도로 발레보다 진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큰데 혜주는 아이들이 말하는 소문을 믿었기 때문에 소희 유령에 빙의 당한 것처럼 굴면서도 진성이 소희를 죽였다는 듯이 말한 것이었다.
윤지를 죽일 때도 혜주한테 왜 그래? 혜주가 불쌍하지도 않아? 하면서 소희인 척 말하는데 이건 혜주의 방어기제도 어느 정도 작용한 결과물이 아닌가 싶었다.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을 단죄하기에 혜주는 어리숙하고 마음이 약하니 '소희'라는 본인보다 강하고 빛나는 탈을 쓰고 대신 단죄하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들을. 그럼 진짜 빙의된 것도 아닌데 혜주가 왜 진성에게 집착하느냐? 이건 혜주가 바라본 소희에게도 진성이 아주 중요한 존재였고, 소희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으니 본인이 소희가 되려면 진성이 옆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혜주가 엿듣거나(기숙사에서 둘이 몰래 놀 때 혜주도 깨어있고 뭔가 듣는 묘사가 나온다.) 몰래 지켜본 소희의 모든 순간에 진성이 함께였을 것이기도 하고. 소희와 진성이 몰래 기숙사에서 같이 놀고 있을 때 키우는 식물 전부에게 널 버리지 않을게, 우린 영원한 친구야. 라고 모두 공평하게 말해주던 혜주는 여우 계단에 살이 빠지게 해달라고 빌어도 친구를 만들지도 못하고, 제 우상을 돌려달라고 빌어도 완벽한 우상이 되지 못해 현실에 그 우상을 불러오지 못한 채 제일 처음부터 원했던 사람의 온기와 애정을 갖지 못한 채 스스로 불을 질러 죽는다는 게 되게 애잔한 죽음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이때의 연출도 진짜 기가 막힌데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혜주는 너무 피곤하다며 중얼거리고 본인이 처음부터 듣고 싶었던 말인 '널 버리지 않을게. 라는 말을 망상 속 소희에게 하며 죽으려고 라이터 불을 켜고, 불이 켜지는 그 순간에 물웅덩이에 비친 혜주가 원래의 혜주 모습으로 보인다. 밝은 갈색 머리카락의 혜주. 버림받고 싶지 않았던 혜주. 친구가 갖고 싶었던 혜주는 그렇게 친구 하나 없이 식물에게 말 걸던 그 모습 그대로 망상 속 소희에게 말을 걸며 외롭게 죽는데 망상 속 소희는 결국 진짜 귀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니까, 스스로에게 자기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하는 공허한 울림처럼 들린다.
윤지는 잠깐 나오는데다 소원이 명확하지 않아 정확히 알긴 어려우나 혜주가 소원을 비는 장면을 본 것 같고(어떤 소원을 빌었는지 안다고 하니까.) 그걸 이루어준다며 죽인 후 점토로 묻었으니 아마 최고의 작품을 만들게 해달라, 내지는 비슷한 뉘앙스의 소원이었을 텐데 그 소원의 본질 역시 작중 나왔듯이 유명하고 천재성 있는 작가가 되는 것이 본질이다. 최고의 작품을 만든 아티스트가 되는 것. 그러나 거꾸로 아티스트가 작품이 되어 죽어버렸으니 윤지가 유명해질 일은 없게 되었고⋯⋯.
이로써 여우 계단은 그 누구의 소원도 들어주지 않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처음 인트로에서 여우야 여우야, 내 소원을 들어줘. 영원히 함께 있게 해줘. 이 소원을 빈 건 어떻게 된 걸까? 소원을 빈 사람은 작중 여러 암시에서 나왔듯이 소희인데(무한대, 영원히 이어지는 표식을 그리는 소희와 진성이에게 먼저 여우 계단 이야기를 꺼내는 소희 같은 장면.), 소희의 소원은 진성이와 함께 웃고 떠들고 같이 발레하는 이런 관계가 영원하길 바란 것이 본심이었으나 여우계단은 이 역시 들어주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절대 이루어지지 않게 갈등 상황 속에서 소희를 죽게 해버린다.
소희가 죽음으로써 영혼이 되어 진성이와 영원히 함께하게 만든 거라고 보는 사람도 있던데, 나는 오히려⋯ 유령이 된 소희가 러시아에 가는 진성이를 막을 방법이 진성이를 죽이는 것 외에는 없는데다 진성이가 유령이 된 소희의 영향을 전부 피하려고 하는 모습에서(당연함. 무서움.) 소희가 원하는 소원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거라고 생각했다. 소희가 '우리,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겠지?' 라고 말하는 것부터 이미 관계는 망가졌음을 알 수 있고 소희가 원한 그 영원한 상태를 유지하는 일은 시작부터 가능하지 않았다.
그걸 알면서도 소희는 진성이를 사랑해서, 그럼에도 함께 있고 싶어서 죽이게 되고 진성이의 '처음으로 되돌려 놓으란 말이야.' 라는 소원이 이루어진 것처럼 다시 신입생으로 기숙사에 들어가는 학생의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가 끝이 난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무서운 점은 소희의 목소리로 소희가 즐겨 부르던 발레곡을 흥얼거리던 신입생이 계단의 수를 세고 올라갈 땐 진성이랑 똑같은 발동작을 보인다는 거다.
소희는 진성이와 '같은 몸에 함께' 같이 태어남으로써 사실상 진성이와 소희, 이 둘의 존재로 영원히 함께 있는 소원은 영원히 이룰 수 없게 되었고 진성이가 바란 '여우 계단에 소원을 빌어 소희가 죽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처음으로 돌려놓으란 소원은 역시 마찬가지로 이룰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미친 계단이?!
이렇게 보면 여우 계단은 소원을 이루어주는 계단이 아니라 소원을 가장한 저주를 들이붓는 괴이인데 이걸 고등학생의 예민한 감수성과 절친 사이에서 발생하는 우정과 사랑, 그리고 예체능이라면 따라올 수밖에 없는 시기와 질투를 잘 버무려 엮어낸 영화라고 생각한다. 사실상 이거 공포 요소가 안 들어갔으면 그 시절 대한민국에서 동성애 때문에 제작이 안 됐을지도. 그런데 이걸 공포와 더 큰 대한민국의 편견이 막아줬죠? 진짜 말도 안 나와. 감독님이랑 토크 올나잇 해보고 싶어. 어떻게 하면 사랑에 미친 순애(광)공 김소희와 기필코 너를 이기고 말리라 능력야망수 윤진성을 이렇게 맛있게 비벼주는지.
게다가 혜주의 심약한 정신 상태와 심리 상황을 마치 소희 귀신에 씐 것처럼 공포스럽게 연출하면서도 군데군데 이거 진짜 소희 아니고 망상이에요. 를 알 수 있게 떡밥 던져주는 걸 잘하시는 건지. 역시 여자 감독은 뭔가 다른 건지.
아, 처음 소희가 죽고 바로 진성이를 찾아간 게 진성이의 망상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던데 나는 이쪽이 진짜 소희고 진성이가 악몽으로 꾸었던 그 목이 돌아가거나 떨어져 죽은 소희의 모습이나 이런 것들이 진성이가 죄책감으로 만들어낸 가짜 소희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진성이를 축하해주고 걱정해주고 여전히 진성이를 좋아하는 마음이 가득하게 구는 소희가 나오는 씬은 창문도 열려 있고 진성이가 자연스럽게 잠에서 깨며 그 몸 위에는 담요도 덮어져있단 말이지. 이불도 아니고 담요. 덮고 있다가 침대 아래로 떨어진 거면 담요도 떨어졌을 텐데 진짜 누가 덮어준 것마냥 얌전히 덮힌 게 누가 봐도 이쪽이 진짜 소희죠? 이 미친 CP 진짜 제발 누가 나랑 안 먹어주나. 정말 좋아요. 정말 맛나요.
그리고 소희가 진성이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장 잘 피력하는 장면은 역시 토슈즈 씬이라고 생각합니다. 토슈즈 안에 유리 넣고 실성한 듯이 웃는 진성이를 이미 봤으면서도 진성이가 제 손에 쥐여준 토슈즈니까 그거 신고 발에 피가 나도 표정 변화 하나도 없이 아무도 눈치 못 채게 테스트 본 거 진짜 미친 광기라고 밖에는 설명이 안 돼요. 그런데 이제 이게 사랑에서 비롯된 광기. 뭐 그런 거.
그리고 소희가 조금 애잔한 캐릭터인 게, 우리는 진성이가 아니라 제3자의 시선으로 볼 수 있잖아. 그래서 소희가 하는 말이나 행동들로 얘가 어떤 삶을 살아왔겠거니, 하는 게 대충 짐작이 되는데 본인 꿈을 자식한테 투영하는 엄마 밑에서 얼마나 달달 볶이며 컸겠어. 심지어 소희가 떨어져서 다리 부상 심각하게 입었을 땐 소희는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오열 중이심. 어머니⋯ 자식이 울고 슬퍼할 시간을 주셔야지 어머니가 다리 잃은 것마냥 대성통곡 하시면 어떡해요⋯⋯. 오은영 선생님 불러. 제발 불러와 봐. 이 병실 씬에서 어떡하냐고 우는 엄마한테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이러면서 자긴 발레 안 해도 상관 없다는 소희 진짜 너무 짠하고⋯⋯. 그러다가도 엄마 우니까 자기가 제일 힘들 텐데 엄마 위로한다고 또 한번 자기 죽이고 자기가 잘못했다고 말한단 말이야. 이게 영화 초입부에 벌어진 일이라면 믿어지시겠습니까? 나 진짜 정신 나갈 것 같아.
이 다음 진성이가 찾아오는데 의연한 척 콧노래 흥얼거리는 소희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꽃바구니만 놓고 가버린 탓에 다리를 다치고 엄마의 꿈과 기대를 잃어도 다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는데, 진성이가 자길 버리고 가는 것만큼은 못 버티겠어서 죽어버린 거 정말 어떡하냐고⋯⋯. 이거 진성이가 자기 다치게하고 콩쿠르 1위해서 죽었다는 사람들 있던데 저 진짜 겸상 안 합니다. 안 해요. 다치기 이전, 콩쿠르 이전에 애네가 뭐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해보면 누가 봐도 진성이한테서도 버려진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선택을 한 거잖아.
김소희, 난 네가 싫어. 넌 너무 날 비참하게 해.
이게 사실 작중에서 소희한테 보인 진성이의 가장 솔직하고도 비겁한 말이라고 생각해. 너는 날 비참하게 하지만 그럼에도 너를 진심으로 싫어할 수는 없었기에, 그 사실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고. 말해줬어야지. 본심을 전후사정 다 자르고 그 마저도 절반만 말하고! 한국말은 뒷말이 중요한테 끝까지 말하지도 않고! 엉엉. 진짜아. 이 말을 듣고 눈 뜨니 병원이고 힘든 상황 연속 발생 시뮬레이션 속에서 내 전부라고 생각한 사람이(그런데 내가 너무 싫대. T.T) 나에게 일언반구 없이 꽃만 두고 가버리면 이거 직접 표정 보지 않고서는 진짜 이제 날 버리고 간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잖아. 이거 소희한테도 진짜 너무 가혹한⋯ 가혹한 일이야⋯⋯.
하, 진짜 이런 미친 CP(?) 나오는 영화 또 보고 싶다. 나 제발 이 영화 처음 봤을 때의 환희와 충격을 다시 느끼게 해줘. 제발. 제발이라는 감정. 넷플에서 내려가지 마. 나랑 영원히 여기 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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